놀고 먹은 것과 놀고 먹을 것/먹는 것

[야식당] 서문

루룰루 2020. 3. 13. 01:43

나는 원체 딱히 입맛이랄 것이 없어 주는대로 잘 먹어서 도저히 못 먹겠다 하는 느낌이 뭔지 당췌 모르고 살았다.

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와 이건 진짜 맛있다 또 먹고 싶다 하는 생각도 딱히 해본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.

사실 스무 살 이전에는 먹고 쌀 줄만 알았지 내 손으로 뭔가 해먹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는데

다시 말하면 요리라는 것이 내게는 대단히 먼 나라 이야기였던 것이다.

 

그러다 학부 때 아는 치들은 전부 삽질하러 가고 남은 몇 명이 한 자취방에 모여서는 어느 날은 치킨이나 뜯다가, 또 가끔은 닭발을 사와서는 나는 뼈가 없는게 좋네 사실 그거 누가 입으로 발라낸 거네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

그 사이에서 집주인을 맡고 있는 형이 혼자 있는 시간에 심심한 시간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며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었다.

처음에는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자 한 그릇 맛나게 말아 갖고 오너라 하고만 있었는데 뭔가 뚝딱뚝딱 슥삭슥삭 하면 한 그릇이 짜잔. 또 어떤 날은 새로운 향신료를 들여왔다며 어쩌고저쩌고 떠드는데 잘 모르겠고 오 맛이 좀 달라졌는가 싶기도 했었다.

그러다 야 나도 한 번 해봅시다 하고 처음 배운 것이 당시에 그 형이 까르보나라라고 공갈친 크림파스타와 콜라로 만든 찜닭이었고 그걸 집에 들여와서 무슨무슨 기념일에 해서는 나눠 먹은 적이 있었다.

어머니는 이야 맛있다 하며 어느 새 야무지게 찍으셨던 사진들을 당시에 막 시작하셨던 카카오스토리에 올리셨었고 그걸 나중에 보고 나름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.

그때부터 뭔가 해먹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당시 열심하던 페이스북에서 요리 무슨무슨 페이지들을 팔로우해서 오 이런저런 요리를 하려면 이러이런 과정들이 필요하군 하고 탐독했었다.

하지만 막상 집에서는 거의 안 해 먹었지.

 

결혼 이후에 내 공간이 생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엌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는데 처음에는 이게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슨 방송에서 첫째 둘째 하며 레시피라고 써놓은 것들 사이사이에 사실 무수한 과정들을 생략해놓은 것이었구나 이 인간들이 하며 당황했다.

로봇을 만들려고 과학상자를 샀는데 넛트 볼트가 하나도 없는 느낌이 들어 집 앞에 있는 슈퍼에 거의 매일 드나들며 싸구려 식기며 소금 설탕 후추며 하는 기초적인 것들을 사날랐고

또 어느 날은 슈퍼 가는 길에 오늘은 집에 닭고기가 있으니 닭 요리를 해볼까 하고 재료를 검색해보니 닭 빼고 집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던 적도 있었다.

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뭔가 해놓으면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참 다행한 일이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진짜 맛이 있어서 한 말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뭐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다 하하.

 

여하튼 애를 놓고 나니 먹을 것에 대한 중요성이 더 늘어나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맛있으면 진심으로 맛있다고 해주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 더 큰 보람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.

물론 그 사람이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이랄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게 진짜 맛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먹을만하면 맛있다고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

어쨌든 나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보람까지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집에서 해먹는 음식이 내게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.

 

그래서 자주는 못 하지만 내가 해본 것과 또 하면서 느낀 점들을 정리해놓으면 나중에 봤을 때 아 이 인간은 만날 해먹는 것만 해먹는 원챔충이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또 어떤 순간에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가 싶더니 역시나 망했나보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

원래는 인스타그램에 정리를 해놓으려고 했지만 핸드폰을 붙잡으면 딴짓 하느라 구 할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는 관계로 여기에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.

정리를 해보자면 나름대로의 야식당을 차려보려고 하는데, 이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어떤 날은 뭐가 먹고 싶어서 만개의 레시피니 백종원의 조리비책이니 하는 것들을 찾아 해본 날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날은 야 이거 지금 안 쓰면 썩어서 다 버려야겠다 싶어서 냉장고 정리 겸해서 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집에서 맘 먹고 해먹는 음식을 총칭하는, 먹을만하면 다행이고 맛없어도 어쩔 수 없는 음식을 하는 야(매)식당 일지 정도면 훌륭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.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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